蘭의 외로움 / 홍윤숙
학창 시절 어느 교양 서적에서 공자의 蘭에 대한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아직 노(魯)나라 대신이 되기 이전, 자신의 학설이나 정견이 조정에 등용되지 않고 외면당하자 크게 마음 속에 실망하여 <지금은 바른 길이 막히고 옳은 것이 외면당하는 난세이니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향리로 내려가 괭이라도 들고 밭을 가는 농부가 되리라> 결심하고 길을 떠나 인적 없는 산길을 더듬어 가던 때였다.
문득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깊은 산, 길조차 없는 숲속에서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고귀한 향기가 가득히 퍼져옴을 느꼈다. 향기를 좆아 찾아가 보니 한 포기의 연연한 난이 수줍은 듯 미풍에 불리며 피어 있더라는 것이다. 고귀한 향기를 소리도 없이 사위에 떨치며.공자는 그 자리에 발을 멈추고 장탄식을 했다.
저런 초목에 불과한 난조차도 길이 없는 깊은 산속에 저혼자 힘껏 피어 있거늘, 하물며 사람인 내가 조그마한 난관에 부딪혀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한다는 일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홀연 깨달은 공자는 그 길로 다시 오던 길을 돌아가 학문을 닦고 길을 가르쳐 마침내 나라의 중신이 되고 대정치가, 유교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글을 읽은 나는 그때 글이 갖은 교훈보다는 전연 다른 감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무도 찾는이 없는 심산유곡, 길도 없는 풀숲에 홀로 피어 있는 난의 외로움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아른거려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다. 피어야 한다는 일, 다시 말하여 살아야 한다는 일이 깊은 산의 난처럼 외로운 일이다. 가족과 이웃과 사회 속에 있건만 산다는 일은 깊은 산의 난처럼 혼자서 치러내야 하는 일이다.
심산의 난처럼 외로운 삶.
많은 현세적인 사람들은 바로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재물과 가구와 아름다운 장식품과 처첨과 수만 권의 서정과 명예와 권세를 .외로운 심산의 난이 자기 안의 고귀한 향기를 밖으로 쏟아냄으로써, 다시 말하여 자기 안의 가장 귀한 것마저 남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스스로의 외로움을 위안하고 있는 데 비해, 인간을 가질 수 없는 것까지를 가지려는 소유로써 외로움의 위안을 삼으려는 것이다.
쌩떽쥐배리는 인간이 마음을 가꾸는 일은 바로 스스로를 바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으는 일이 아니라 주는일, 갖는 일이 아니라 버리는 일. 기실 언젠가는 그 자신마저 존재의 마지막 길목에서 대자연으로 돌려주어야 하는 인간의 생명이다. 하면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큼이나 우리의 외로움을 위안할 수 있는가.
그 마지막 길목에서...
난은 어차피 외로운 것이다.
어디서건 피어야 하며, 피어서 향기를 주고 빛깔을 주고 의미를 주고 짧은 생애를 다 주어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가는 난은 후회가 없다. 오직 충만이 있고 평안이 있을 뿐, 간 뒤에도 길이 기억되고 더욱 추앙받는다. 가질 수 있는 한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가는 이는 추한 미련이 남고 아쉬움이 엉긴다. 마음은 도둑처럼 설레며 걸음걸음 뒤돌아다 보아진다. 평화도 안식도 없고 의구만이 남는다. 외로움 위에 오뇌가 겹치는 것이다.
난은 어차피 외로운 것이다.
외로울 바에야 심산에 홀로 피는 난처럼 곱고 향기롭게 외롭고 싶다.
글쓴이 : 홍윤숙 -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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